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포커스

같은 강물에 두 번 목욕할 수 없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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時間(시간), 그 괴이(怪異)함에 대하여…

 

 

[장양수 박사] 젊은 날 나를 붙들고 놓아 주지 않은 여러 문제 중 하나가 ‘時間(시간)’이라는 것이었다. 내가 호기심에 끌려 그에 대한 이 책, 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알 수 없는 괴이한 것이 時間이었다.

 

옛사람들이 ‘같은 강물에 두 번 목욕할 수 없다.’고 한 말에 잘 나타나 있듯, 그것이 한 번 가고는 다시는 안 온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어떤 서글픔을 안겨 주면서 불가사의한 것으로 생각되게 했다. 《聖經(성경)》에 딱 한 번 시간이 멈춰 선 이야기가 나온다. 「여호수아기」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여호수아가, 아모리족을 칠 때 해로 하여금 적을 섬멸할 때까지 그대로 멈추어 서 있어달라고 기원하자, 해가 온종일 하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고 하고 있다.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태양이 멈춰 섰다기보다 하느님을 믿는 히브리인들의 마음이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겠는가 싶다.

 

생각하면 時間이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거쳐서야 비로소 존재하는 것 같다. 時間은, 그것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데 단정적으로 그렇게 말하기도 주저되는 데가 있다. 과거, 현재, 미래가 있다 하나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,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. 그런데 그 현재라는 것도 과거와 미래의 한 接點(접점)으로 幅(폭)이 없는 찰나적인 時點(시점)에 불과한, 측정이 불가능한 것이다. 곧 현재라는 것도 우리가 ‘현재’라고 말했을 때에는 이미 그 時間은 가 버리고 없는 과거일 뿐인, 없다고 할 수도 없지만 무슨 幻視(환시)처럼 있다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다.

 

그 중에서도 時間이라는 것이 나에게 가장 큰 悲感(비감)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것이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, 가차 없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. 선녀 같이 아름다운 美人(미인)도 軒軒丈夫(헌헌장부)도 잠깐 세월에 보기도 민망스런 늙은이가 되고 만다. 어떤 생명체도 하늘이 허락한 時間이 지나면 그 실체는 한 줄기 연기, 한 줌의 흙먼지, 재로 사라져 버린다. 아무리 단단한 돌에, 금속에 깊이 새긴 인간의 行績(행적)도 비에 씻기고 바람에 닳아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만다.

 

그러는 사이에 내 곁으로도 時間은 흘러 나는 노인이 되었다. 그런데 그 사이에 나는, 時間에 대한 나의 생각이 많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. 언젠가, 나는 내가 時間을 지나치게 내 중심으로 조급하게 생각해 왔다는 것을 알았다. 인간의 수명은 고작 백 년인데 宇宙(우주)의 時間은 무궁한 것이다. 그 宇宙의 무궁한 時間을 생각하면 인간의 이해력, 인식력이 훨씬 더 커지는 것 같았다. 예를 들면 老子(노자)의 《道德經(도덕경)》 중,

 

山是山 水是水(산시산 수시수)
山不是山 水不是水(산불시산 수불시수)
山是水 水是山(산시수 수시산) /

 

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오, 산은 산이 아니오 물은 물이 아니다. 산은 물이오 물은 산이다.’라고 한 구절도 이 宇宙의 긴 時間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절대로 이상한 궤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. 長久(장구)한 세월을 두고 보았을 때 地球(지구)는 그 저변의 맨틀의 움직임에 따라 隆起(융기)하고 沈降(침강)한다.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는 본래 한 대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. 그 생긴 것을 보면 전자의 西岸(서안)과 후자의 東岸(동안)을 짜 맞출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. 그러니까 위에서 인용한 그런 말이 가능한 것이다. 《老子》를 그런 식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고 퉁을 줄 사람도 많겠지만 아무튼 서투른 독자는 그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나 한다.

 

또 한 가지, 수천 미터 산 위에서 조개껍질 화석이 발견되고 저 깊은 바다 밑에서 고대도시의 유적이 발견되는 것도 이 宇宙가 무한히 變轉(변전)하고 있다는, 소위 桑田碧海(상전벽해)를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.

 

내가 時間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면에서 비관적인 데서,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꾼 것은 그것이 인간의 상처를 治癒(치유)해 주는 美德(미덕)을 가졌다는 것 때문이었다. 동물도 식물도 치명적인 상처만 입지 않으면 별다른 처치를 안 해도 時間이 지나면 그 상처가 아물어 낫게 된다. 사람의 경우 피부가 베이고 찢어져도 보통 2주 만 지나면 낫고 뼈를 다쳐도 3~4주면 낫는데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바로 그 時間의 治癒力(치유력)이다. 더욱 고마운 것은 時間이 육체적 外傷(외상)뿐 아니라 정신적 상처까지 낫게 해 준다는 것이다.

 

시골에서 자랄 때의 경험인데, 젖 뗄 때가 된 송아지를 팔고 나면 어미 소가 운다. 그런데 그 울음이 제가 배고플 때 흔히 우는 그 소리와 다르다. 서서 여물을 먹다가도, 앉아서 새김질을 하다가도 瞬瞬(순순)이 저 먼 어디를 바라보고 길게 우는데, 그 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말할 수 없이 아프게 하는, 슬프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. 그래서 소년 시절의 나는 그 울음소리를 들으면 귀를 막고 싶어지기까지 했다. 그러나 어미 소가 그렇게 슬피 우는 것은 딱 사흘이다. 사흘이 지나면 소는 피붙이를 잃은 그 슬픔, 아픔에서 풀려나는 것이다.

 

인간도 그런 면에서 보면 별 다를 것이 없지 않나 한다. 失戀(실연)을 하고, 사랑하는 사람과 死別(사별)하고, 단 며칠도 살 수 없을 것 같던 사람도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면 차츰 그 고통에서 헤어나 어느 날부터인가는 맛있는 것도 챙겨 먹고, 소리 내어 웃기도 하면서 자기 앞의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. 내 생살을 떼어간 것 같은 그 고통을 언제까지나 안고 살아야 한다면 인간의 삶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지옥이겠는가. 생각만 해도 끔찍스럽다. 그래서 나는, 육신과 영혼의 상처를 아물게 해 주는 그 時間의 흐름이라는 것이 한없이 고맙게 생각된다.

 

  • 이정근 기자